지산선생 연보
연 보(年 譜)
조선 인종대왕仁宗大王 원년元年 을사乙巳, 154510월21일 선생이 창원부昌原府 지개동芝介洞의 이제里第에서 부친 윤신과 모친 인동장씨 사이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년도 나이 내용
1552년 8세 처음으로 아버지 참찬공(參贊分)윤신에게 글을 배웠다.
1554년 10세 교리校理인 구봉龜峯 주박周博에게 종유從遊하며 글을 배웠다.
1560년 16세 진주晋州의 하과夏課에 수석[魁]을차지하였다.
○가을에 향시鄕解에응시하여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 및 문과시文科試에 모두 합격하였다.
1561년 17세 윤5월閏五月에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선생退溪先生을 찾아뵙고 마침내 배우기를 청원하였다.
1563년 19세 퇴계 선생을 마중 나가 뵙고 대학大學을 강독하였다.
1565년 21세 취원당공聚遠堂公과 함께 도산에 가서 퇴계 선생을 뵈었다.
주자어류朱子語類・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강독하고 질문講質하여 구명하였다.
1566년 22세 향시鄕解에 합격하였다.
1567년 23세 6월에 퇴계 선생을 도산에서 뵙고 이어서 모시고 서울로 갔다.
당시 퇴계 선생이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올라가시는데 선생께서도 장차 과거[禮圍]에 응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잠시 머물면서 강독하다가 이로 인하여 퇴계 선생을 모시고 서울로 갔다.
1570년 26세 12월에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애도하였다.
1571년 27세 기고봉대승奇高峯大升이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11월 5일 참찬공參贊公의 상喪을 당하였다.
1572년 28세 봄에참찬공을창원부昌原府 북쪽 옥비동玉碑洞 유좌酉坐의 터에 장사지냈다.
1573년 29세 12월에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의 상喪을 당하였다.
봄에 정부인貞夫人을 참찬공의 묘소 오른쪽에 부장祔葬하였다.
이미 장사를 지내고는 산소 곁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하면서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을 마쳤다.
1575년 31세 2월에 3년 상喪을 마쳤다.
인순왕후仁順王后의국상國喪중에 졸곡제卒哭祭를 지내지 않았다고 하여 담사禫事를 행할 수 없었다.
3월에 도사都事 최황崔滉이 없는 사실을 꾸며 임금에게 전가사변全家徙邊하도록 아뢰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동江東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있게 되었다.
1576년 32세 3월에 강동江東으로 귀양길을 떠났다.
강동江東에 도착하여 지성인池姓人의 집에 유숙하였다.
서정부西征賦를 지었다.
**지패紙牌:지방紙榜을 써서 붙이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제사忌祭祀를 지냈다.
1577년 33세 고지산高芝山 아래 살 곳을 가려 정하였다.
선생이 그 위에다 대臺를 짓고 명옥鳴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서재書齋는 수지遂志 당堂은 풍뢰風雷라하여,
좌우左右에는 도서圖書를 비치하고 그 가운데 단정히 앉아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느라
보잘것없는 끼니를 여러 차례 걸렀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였다.
학도學徒가 몰려들어 서사書舍에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1578년 34세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관서 지역의 습속은 사리에 어두움이 심하여 옛날의 예절禮節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선생이 곧 단壇을 설치하고 향음주례를 실행하여 읍揖하며 사양하는 절차를 보였다.
5월에 취원당공이 임지任地에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통곡痛哭하였다.
12월에 막내 동생 사직司直 겸익謙益이 세상을 떠나 통곡하였다.
1579년 35세 학과의 규칙[學規]을 세우다.
선생께서 학도學徒들이 습속習俗에 익숙하여 떨치고 분발 振拔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학과學課의 규칙을 엄격히 세우고 게을리 하지 않도록 장려奬勵하였다.
1580년 36세 고지사高芝寺를 건축하게 하였다.
1581년 37세 이시직李時稷이글을배우러 왔다.
1582년 38세 5월에 말미를 받아[受由] 남쪽으로 돌아와 선영先塋에 성묘省墓하였다.
1585년 41세 4월에묘향산妙香山에유람하였다.
6월에향풍산香楓山에유람하였다.
1586년 42세 계몽啓蒙을 강독하였다.
김흥우공金興宇公이 설시揲蓍 등의 편篇을배웠다.
김육金堉이 와서 배웠다.
1587년 43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읽고 의심나는 뜻을 고증考證하였다.
조목마다 판본의 윗부분에 주석을 달아 보고 살피는데 대비하게 하였다.
뒤에 손수 문인門人 김육에게 주었다.
1588년 44세 봄에 말미를 받아 남쪽으로 돌아와 선영에 성묘하였다.
최황이 경연經筵에 들어가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아뢰었다.
1589년 45세 관서 유생關西儒生 황경화黃慶華 등이 소疏를 올려 사리를 밝혀 진술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손수 관서부자關西夫子 네 대자[四大字]를 써서
특별히 하사하고 장려하였다.
1592년 48세 4월에 산사山寺에 유람하였다.
김육이 왜란倭亂을 피하여 그의 숙부叔父 김흥효金興孝와 함께 가족 수백 명을 데리고 와서 함께 우거寓居하기를 청원하였다.
5월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기에 선생이 부름을 받고 행재소行在所:임금의 임시 거처로 달려가 절하고,
이어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을 토벌討伐하라는 명을 받들었다.
중화中和・상원祥原 사이를 왕래하면서 여러 번 싸워 이기고 노획하였다.
1593년 49세 정월正月 초2일에 명나라 군사를 따라서 평양平壤의 왜적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마침내 함경도[北道]로 들어가 왜적을 토벌하고 양주楊州까지 추격하며 또 격파하였다.
3월에 임금이 전지傳旨를 내려 칭찬하면서 녹피鹿皮:사슴 가죽 1령領을 하사[宣賜]하였다.
4월 25일에 부인夫人 허씨許氏가 강동江東에서 세상을 떠났다.
5월에 적의 뒤를 밟으며 남쪽으로 내려가 양산梁山에서 진陣을 치고 머물렀다.
6월에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임명되었다가 곧 바로 체임遞任되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즉시 부임赴任하지 않았다고 하여 체임하도록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1월에 셋째 형[第3兄] 생원공生員公이 세상을 떠나 통곡하였다.
1594년 50세 3월에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0월에 벼슬을 버리고 영천永川으로 돌아가다.
10월에 부인夫人 신씨愼氏에게 새로 장가들었다.
1595년 51세 4월에 의흥위 부사정義興尉副司正에 임명되었다.
○강동江東으로 되돌아 왔다.
당시 남쪽 지역에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또 부인 허씨를 안장安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드디어 가족을 데리고 강동으로 돌아왔다.
5월에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596년 52세 3월에 임금이 표리表裏:옷감의 안팎 감 1습襲을 하사하였다.
5월에 병[疾]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성천成川 현명산玄明山 아래 우거寓居하였다.
8월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
공물貢物을 바르게 하고 부역賦役을 줄이며, 학교를 일으키고 예악禮樂을 숭상하니
몇 달 사이에 행정行政과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졌으므로 사람들이 신명神明같다고 칭송하였다.
성천지지成川地誌에 기재되어 있다.
1597년 53세 봄에 강선루降仙樓를 중수重修하였다.
5월에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8년 54세 안주安州의 삼천촌三阡村으로 옮겨서 우거寓居하였다.
1599년 55세 2월에 병病이 위독하여 평소의 잡고雜稿를 모두 불에 태웠다.
3월에 정주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다.6월에 병으로 체임遞任되었다.
7월에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우거寓居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되돌아 왔다.
창원昌原의 선영先塋을 개장改葬하였다.
9월에 영천군永川郡 서쪽 도촌陶村에 우거寓居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찾아왔다.
1600년 56세 봄에 공암孔巖에 유람하였다.
1601년 57세 봄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에게 편지를 보내다.
당시 진주晉州의 사림士林이 김학봉金鶴峯:김성일金誠一을 위하여 촉석루矗石樓 곁에다
사우祠宇를 세우려고 하면서 바야흐로 이공李公에게 관여關與하여 처리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김학봉의 순수한 충성과 죽기를 각오하고 대의大義를 지킨 절개를 심도 있게 말하면서,
이공이 조정에 돌아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권면하였다.
1602년 58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찾아가 조문弔問하였다.
3월에 교정청 당상관校正廳堂上官으로 임명하여 재촉하며 불렀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부임하지 못하였다.
주역석해周易釋解를 지었는데 모두 다섯 권이다.
1603년 59세 2월에 지산촌芝山村의 살만한 곳을 골라 이사하였다.
그 곳에다 터를 잡아 집을 짓고 편액扁額하기를, 당堂을 졸수拙修,서재書齋를 완여翫餘,
정자를 망회忘懷라 하고, 못을 막아 물을 모으고 도화담桃花潭이라 불렀으며,
못 가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수면水面에 은은히 비치게 하였고,
못 가운데에 있는 대臺를 지어知魚라고 불렀는데,
달밤을 틈타 배를 띄우고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부르기도 하였다.
영지암靈芝菴을 수리하였다.중[緇徒] 몇 사람을 구하여 수리하도록 맡겼다.
그리고는 이름을 영지암靈芝菴으로 고쳤으며 기문記文과 시詩를 남겼다.
서화담徐花潭:서경덕徐敬德의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의 뒤에다 평론을 쓰다.
제서질의諸書質疑가 완성되었다.
1604년 60세 모월某月에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수암守菴 정사진鄭四震의 예설문목禮說問目에 답하다.
○9월에 노재공魯齋公에게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 추증追贈되다.
조정朝廷에서 선생이 선무일등훈宣武一等勳에 등록登錄되었으므로 은혜가 추가로 내려지는 명령이 있었다.
조남명曺南冥:조식曺植의 관서문답변關西問答辨 뒤에 평론을 쓰다.
1605년 61세 주역周易을 읽고 단상彖象의 의심스러운 뜻을 미루어 설명하다.
선생이 일찍이 역전변해易傳辨解를 저술하였지만 몸소 불에 태워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주역을 읽으시고 의심나는 뜻을 미루어 밝혀 조목마다 판본板本의 상단上段에 써서 붙였는데,
후세의 선비들이 그것을 베껴모아「역상추설易象推說」이라고 불렀다.
1606년 62세 모월某月에남원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곡강서원曲江書院에 회재 선생晦齋先生:이언적李彦迪의 위패를 모시는 봉안문奉安文을 지었다.
상향문常享文도 지었다.
셋째형생원공生員公의셋째 아들 이수以需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매헌梅軒 임흘任屹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경재잠警齋箴 문목問目에 답하다.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 완성되다.
1607년 63세 3월에 포은선생시집圃隱先生詩集의 중간 발문重刊跋文을 쓰다.
장여헌과 여헌을 종유하는 여러 선비들이 찾아와서 며칠 동안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강론講論하였다.
복재復齋 정담鄭湛이 제례祭禮에 관하여 논한 편지에 답하다.
임흘任屹의 예설禮說 및 소학 문목小學問目에 답하다.
11월에망우당忘憂堂곽재우郭再祐의창암정滄巖亭으로 보내는 시詩를 짓다.
학도學徒들이망회정忘懷亭 곁에다서재書齋를건립하였다.
조경曺瓊・정사상鄭四象・정장鄭樟・이의혼李宜渾・이의잠李宜潛・박돈朴暾・김취려金就礪
등이 합동으로 모의謀議하여 지었다.
1608년 64세 2월에 선조[宣廟]가 승하昇遐하였다.6월에 병을 무릅쓰고 선조 대왕의 장례[因山]에 달려갔다.
서울[京中]의 학도學徒들에게 학업學業을 강론하고 질문하게 하였다.
김육金堉・이유성李惟聖 등이 와서 모시고 강학하였으며,
선생이 되돌아감에 이르러 모두 한강 나루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1609년 65세 3월에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편지에 답하다.
7월에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이 완성되다.이기변理氣辨을 지었으나 끝내지 못하였다.
논어집주보유論語輯註補遺를 지었다.
그러나 책으로 완성시키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가례고증家禮考證을 지었으나 책으로 완성시키는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8월 18일 병인 유시酉時에 망회정忘懷亭에서 천수天壽을 누리다 돌아갔다.
12월 15일 경오에 영천군永川郡 남쪽 송청산松靑山 진좌辰坐의 터에 장사지냈다.
김육金堉・박대덕朴大德 역시 달려와서 다른 문인들과 함께 장례 지내는 일을 보살폈으며,
사림士林들도 일제히 모였다.
1612년 광해4 8월에 묘우廟宇를 서재書齋 뒤에 건립建立하였다.
○그 뒤 42년 만인 계사년癸巳年:1653, 효종4에 개상동塏爽洞으로 옮겨 세웠다.
그리고 또 21년 뒤인 계축년癸丑年:1673, 현종14에 옛터로 다시 옮겨지었다.
1613년 광해5 12월 초 4일 정해 에 위판位板을 봉안奉安하였다.
본도本道의 사림들이 일제히 모여 성대한 의식 縟禮 을 거행하고
지봉서원芝峯書院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626년 인조4 정월 초6일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 되었다.
1635년 인조13 4월 초8일에 관서關西의 사림士林들이 선생을 학령서원鶴翎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
1642년 인조20 4월에 신도비神道碑를 망회정忘懷亭 동쪽에다 세웠다.
문간공文簡公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었으며,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의 지識가 있다.
1646년 인조24 9월에 행장行狀이 완성되었다.
문정공文貞公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지었다.
1650년 효종1 가례고증家禮考證을 간행刊行하였다.
민응협閔應協공이 경상도 관찰사[嶺伯]가 되어 간행하였다.
1660년 현종1 모월某月에 학령서원鶴翎書院의 편액扁額이 하사되고, 또 경서經書가 하사되었다.
1663년 현종4 12월에 본도本道의 유생儒生이 소疏를 올려 시호諡號를 청원하였다.
예조禮曹에서 회계回啓하였지만 윤허允許를 받지는 못하였다.
1672년 현종13 8월에 관서의 유생이 소를 올려 청계서원淸溪書院의 편액을 내려주기를 청원하였다.
1678년 숙종4 3월 도잠서원道岑書院의 편액扁額이내려졌다.
예관禮官 이상제李尙悌를 보내어 본원本院에 사제賜祭하였다.
1680년 숙종6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를 간행刊行하였다.
1681년 숙종7 모월某月에 묘갈명墓碣銘이 완성되었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묘갈명을 지었다.
1727년 영종3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하였다.
1779년 정조3 속집續集 및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을 간행하였다.
1862년 철종13 9월에 본도本道의 유생儒生이 또 상언上言 하여 시호諡號를 청원하였다.
11월에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성균관 제주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成均館祭酒에 증직贈職되었다.
도덕과 학문[道學] 충성과 의리[忠義]가 탁월하고 특이하다는 것으로 증직을 더하는 일을
승전承傳: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전함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겸재李謙在가 회계回啓하여 윤허允許를 받았다.
12월에 예조禮曹에서 시호諡號를 내려 주도록 계청啓請:임금에게아뢰어청함하였다.
일이 해당 조[該曹]에 회부되자 예조판서禮曹判書 이근우李根友가 회계回啓하였다.
1863년 철종14 10월에 정간貞簡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청렴결백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킨다는 정貞과 정직하고 간사함이 없다는 간簡이다.
○시장諡狀은 김병학金炳學이 지었다.
1864년 고종1 7월에 시호諡號를 문간文簡으로 고쳐서 내렸다.
도덕道德이 널리 알려졌다는 문文과 정직하고 간사함이 없다는 간簡이다.
10월에 관원官員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예관禮官은 김종환金宗煥이다.
1883년 고종20 문집文集및가례고증家禮考證・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역상설易象說을 다시 간행刊行하였다.